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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시

오지않네, 모든 것들 / 함성호(1963~)

by 전문MC 이재영 2007. 2. 20.


오지 않네, 모든 것들

                            함성호


나 은행나무 그늘 아래서
142번 서울대―수색 버스를 기다리네
어떤 날은 나 가지를 잘리운
버즘나무 그늘 아래서 72-1번 연신내행
버스를 오래도록 기다리고
그녀의 집에 가는 542번 심야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린 적도 있네
앙상한 가로수의 은밀한 상처들을 세며
때로는 선릉 가는 772번 버스를
수없는 노래로 기다리기도 하네
그러다 기다림의 유혹에 꿈처럼
143번 버스나 205-1번 혜화동 가는 버스를
생으로 보내버리기도 하고
눈 오는 마포대교를 걸어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나 실연의 시를 적기도 했다네
어느 한 날은 205번 버스나 50-1번 좌석버스를
깊은 설레임으로 기다린 적도 있었지만
그 짧은 연애를 끝으로 눈 내리는 날에서
꽃이 피는 날까지
그런 것들은 쉽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네
패배를 기억하게 해주는 것들, 이를테면
성남에서 영등포까지, 홍등이 켜진 춘천역 앞을
지나던 그 희미한 버스들을
이제 나는 잊었네
나 푸른 비닐 우산의 그림자 안에서
기다림의 끝보다
새로운 기다림 속에 서 있음을 알겠네
오늘도 나 147번 화전 가는 버스나 133-2번 모래내
가는 버스를 기다리네
이제는 더 이상 부를 노래도 없고
어느 누구도 나의 기다림을 알지 못하네
오지 않네, 모든 것들
강을 넘어가는 길은 멀고
날은 춥고, 나는 어둡네

-시집『성 타즈마할』(문학과지성사) 중에서

 






1963년 강원도 속초 출생
1990년 [문학과사회] 등단
‘21세기 전망’ 동인, 웹진 PENCIL, 계간 <문학 판> 편집위원
시집으로 <56억 7천만 년의 고독> <聖 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산문집 <허무의 기록>,

그 외 <만화당인생><건축의 스트레스> 등 다수
1991년 건축 전문지 <공간>에 건축 평론이 당선되어

건축 평론가로도 동하고 있으며,  

현재 건축설계사무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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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려 본 사람은 압니다.
쉬이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느티나무며, 은행나무의 은밀한 상처들에게 마음 주었던 시간들,
하루가 다르게 잎그늘을 늘리고 있는 이파리를 올려다 보며,
바람의 방향을 재던 설레임의 시간들을 기억합니다.
우리 사는 일도 어찌 보면 수많은 노선버스며,

희미한 기다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사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기다림의 끝보다 새로운 기다림 속에서 늘 아름다웠던 순간들이여.
우리가 기다리는 버스는 어디쯤 오고 있는 것인지요.
길은 저리 멀고, 날은 어두워져 가는데... (양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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