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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시

운우지정 / 이선이

by 전문MC 이재영 2007. 2. 13.


운우지정

이선이


뒤곁에서
서로의 똥구멍을 핥아주는 개를 보면
개는 개지 싶다가도
이 세상에 아름다운 사랑이란 저리 더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머물러서는
마음도 미끄러진다

평생 바람처럼 활달하셔서
평지풍파로 일가一家를 이루셨지만
그 바람이 몸에 들어서는 온종일 마루바닥만 쳐다보시는 아버지
병수발에 지친 어머니 야윈 발목 만지작거리는 손등을
희미한 새벽빛이 새겨두곤 할 때
미운정 고운정을 지나면 알게 된다는
더러운 정이라는 것이 내게도 바람처럼 스며드는 것이다

그런 날 창 밖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려
춘향이와 이도령이 나누었다는 그 밤이 기웃거려지기도 하지만
그 사랑자리도 지나고 나면
아픈 마나님 발목 속으로
불구의 사랑이 녹아드는 빗소리에 갇히기도 하는데

미웁고 더럽고 서러운 사람의 정情이란 게 있어
한바탕 된비 쏟아내고는 아무 일 없는 듯 몰려가는
구름의 한 생生을 머금어 보곤 한다





경남 진양 출생.
199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서서 우는 마음>, 평론집 <생명과 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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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사랑이라는 게 참 묘한 것이어서,

반드시 아름다운 마음만 가지고 깊어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사랑이란 좋아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

그리고 때로 더러운 것까지 함께 공유하는건지도 모른다.

달콤했던 한 시절의 뜨거운 사랑을 건너와 지금은 시린 빗소리에

속절없이 발목이 갇히고 마는 연로하신 부모님의 사랑이

습자지에 배인 바람처럼 잔잔하게 묻어나온다.

情으로산다는 말,

더러운 情으로 산다는 말이

쿵, 하고 가슴을 친다.
(양현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