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딸이라는 말이 있다.
참 다양한 뜻을 지닌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1. 자명종이나 전종(電鐘)에서 종을 때려 소리를 내는 작은 쇠방울.
2. ‘삼륜차’나‘경운기’를 속되게 이르는 말.
3. ‘자전거’를 속되게 이르는 말.
4 ‘수음(手淫)’을 속되게 이르는 말.
이상 네 가지가 소위 공인된 딸딸이의 훈(訓)인데,
재미있는 건 정작 1번의 용도로는 딸딸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우리 일상에서 쓰이는 딸딸이는 모두 무언가를 '속되게 이르는' 말인 셈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현재 양천구는 강서구도 아닌 영등포구에 속해 있었다.
아파트 단지와 일반주택과 심지어 초가집까지 어우러진 동네였으며
군데군데 꽤 넓은 밭도 많았고 개천이나 또랑도 제법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제일 먼저 접한 속되게 이르는 말 '딸딸이'는 경운기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는데, 경운기를 몰 줄 아는 친구에게 배워서
약 5분에 걸쳐 실제로 운전을 해본 적이 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딸딸이를 몰 줄 아는 꼬맹이들이 제법 있을 것이다.
자전거를 딸딸이라 부르는 건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짐자전거를 딸딸이라 부르는 어른을 만나본 게 고작이다.
삼륜차는 이제 숫제 보기조차 어려우니 바퀴가 셋밖에 없는 자동차가
세상에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은 마당에 하물며 그 별명이 남아있을 까닭이 없다.
암튼 자전거는 화려하고 해피한 업그레이드를 거쳐 일찌감치 속되게 이르는 말을 내다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경운기는 21세기를 맞이한 지금도 속되게 이르는 말인 '딸딸이'로 통한다.
자전거는 그 후로도 계속하여 싸이클, MTB, 동력자전거 등으로 분화를 거듭했고
초등학교 영어교과서에도 당당히 바이씨클 또는 바이크로 등재된 반면 재래형 경운기는
신형 트랙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트랙터가 있지만 '딸딸이'란 별명을 여전히 달고 다니는 트랙터는
모터와 휘발유통 뒤에 Y자 형 손잡이, 다시 그 뒷부분엔 철상자를 달고 있으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조차 운전할 엄두를 내는 만만한 재래형이다.
뭐니뭐니 해도 딸딸이는 '수음(手淫)'을,
그것도 특별히 인간 수컷들의 수음만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서 가장 유명하다.
활용형은 '-치다', 즉 딸딸이치다.
빠른 녀석들은 초등학교 4학년부터 치고, 늦어도 중학생이면 칠 줄 알고,
어떤 녀석은 날마다 치고, 어떤 녀석은 정 참지 못할 때에만 친다.
어른도 친다.
옛날엔 여자친구의 순결을 지켜주기 위해서 집에 돌아가
골방에서 기도하듯이 치는 숭고하고 갸륵한 딸딸이도 엄연히 존재했다.
아내 혹은 애인이 생리중이거나 우울할 때에 가끔씩 점잖게 치는 사려 깊고 자상한 딸딸이도 있다.
그러한 남편 혹은 애인의 딸딸이 속에는 그대가 있다.
서태지의 노래처럼 "상상 속엔 그대가 있다!"
그렇다고 그대의 남자를 딸딸이 속에 너무 오래 방치하지는 마라.
'성적불만' 또는 '성격차이'를 이유로 그가 당신을 떠날 때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면.
사전에 없는 딸딸이도 있다. 현역으로 군복무를 한 남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이 때에도 속되게 이르는 말인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암튼 이등병 시절 고참이 내게 '딸딸이' 어쩌고 할 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던 생각이 난다.
말로만 듣던 군대 성희롱이 시작되나 보다.
"야, 이 새끼야. 딸딸이 가져 오라니까 뭐해?" 딸딸이를 가져 오라고? 그게 어떻게 하는 거지.
두렵고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모르고 오도카니 서 있는 나를 본 일병 하나가
재빨리 슬리퍼를 그 고참 앞으로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아, 신병이 말입니다. 딸딸이가 뭔지 몰랐나 봅니다 말입니다."
고참이 사라지자 일병이 말했다.
"야, 이 새끼야. 니가 아무리 서울놈이라지만 딸딸이도 모르냐?
꼭 쓰레빠라 그래야 알아듣냐? 암튼 서울 뺀질이들은..." 그랬다.
군대에 가면 슬리퍼를 딸딸이라 부른다.
언제부터 그렇게 쓰였을까?
지금도 나는 슬리퍼를 신다가 슬리퍼가 바닥에 닿으며 내는 소리가
딸딸딸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언젠가는 국어사전에 <5.(군대 등지에서) 슬리퍼를 이르는 말>로 등극할 날이 있겠지.
그 때에는 '속되게'가 빠져주었으면 좋겠다.
슬리퍼 말고도 사전에 없는 '딸딸이'가 하나 더 있는데,
이 때의 딸딸이는 사물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 놓인 인물을 일컫는 말이다.
딸이 둘 이상 있되 아들은 없는 부모를 이름하여 딸딸이 아빠엄마 혹은 그냥 줄여서 딸딸이라 부른다.
이 용도의 딸딸이는 탄생 초기에는 엄연한 비아냥이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애칭이 되었고 근래에는 부러움 섞인 말로 대접받는 눈치이다.
바야흐로 아들이 아들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시절이요,
같은 성을 쓰는 자식으로 대(代)를 잇는다는 생각이 낡은 것으로 취급되는 시절이요,
더 나아가 어차피 훗날 실버타운에서 살아야 할 마당에
대는 이어서 무엇하냐는 생각이 팽배한 시절이기 때문일 게다.
그런 점에서 아들 키우기보다는 딸 키우기가 훨씬 즐거움이 큰 탓일 게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딸딸이'는 국어사전에 오를 일이 없을 것 같다.
내가 아는 딸딸이는 위의 여섯 가지가 전부이다.
그러나 또 있겠지.
세상은 넓고 할 말은 많은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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