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선
정신을 맑게 가다듬고 자기 자신과 주변을 차분히 관찰하다 보면
입에서 떨어지는 말보다 훨씬 강력하게 움직이는 살아있는 언어를 읽어낼 수 있다.
입술의 말은 언어 가운데 가장 부정확한 언어이다.
그러므로 행위, 눈빛, 손짓, 발짓, 어조, 음색 등이 전하는 소위 '말 없는 말'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며 늙어가는 것은 너무 불행한 일이다.
"지구를 옷처럼 둘러싼 저 구름이 모두 바다에 녹고 산과 산맥과 강과 바다의 돌들이
모조리 흙이 되어 버리고 누군가 밤하늘의 별을 전부 헤이는 날이 올 때까지,
(○○○),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결코 바래지 않을 것이오."
아무리 진실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썼더라도 위의 큰따옴표 속의 말은 거짓말이다.
진실한 마음에서 비롯된 말이라 할지라도 거짓말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서로 주고받는 말 가운데에는 진실하면 진실할수록 도리어 거짓이 되는 말들이 제법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랑의 맹세이다.
가벼운 사랑일수록 맹세와 다짐이 빈번한 법이라서 우리 현실 속에는
다음과 같은 시납시스 속의 남녀 주인공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사내는 주워들은 미려한 수사로 여자를 현혹하고,
여자는 반지와 브로우치를 팔아 사내를 위로하고 돌아가 기도를 한다.
시절은 사내의 손과 머리에 붉은 녹을 슬게 하고, 시간은 여자의 눈과 이마에 주름이 들게 한다.
사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젊은 것을 찾고, 여자는 사랑할밖에! 소중했던 인연, 눈물의 샘.
사내는 죽음의 자리에서야 여자를 찾으며 속죄의 눈물을 흘리고,
여자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며 식어가는 그의 몸 앞에서 비탄의 세례를 베푼다.』
타인의 혀끝에서 놀아나지 않으려면 평소 감각을 단련시켜야 한다.
자기 자신과 주변을 입체적으로 세밀하게 관찰하는 능력을 키워 보라.
현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거실을 거쳐 방안에 들어와 외출복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다시 방을 나가 욕실로 들어가 손발을 씻는 그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일상의 모습조차
날마다 약간씩 다름을 알게 될 것이다.
일상은 결코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일상을 지루하다 느끼는 것은 일상 탓이 아니라 나태나 피로에 의해 관찰력이 둔해졌기 때문이다.
관찰의 습성을 통해 생기를 되찾은 당신은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의 입에서
굳이 사랑의 고백이나 맹세가 흘러나오지 않아도 그 또는 그녀가 생기 넘치게 나를 사랑하는지
혹은 그 또는 그녀가 내 처지를 돌아보기 어려울만치 자기 문제 속에 빠져 허덕이며
도리어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분별할 줄 알게 될 것이다.
- 2006.03.20 유용선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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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쓴 글이 마치 남의 생각처럼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글을 쓰고 새로운 글을 읽으려는
글쟁이 특유의 집착 또는 강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날 자기가 쓴 글을 꺼내어 다시 읽으며 그로 오늘의 나를 각성시키는
거울과 채찍을 삼지 못한다면 글을 쓰는 일의 가치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누구보다 먼저 나 자신에게 말한다.
따라서 당연히 나는 누구보다 먼저 나 자신의 말을 가장 귀담아 듣는다.
그것이 내가 과거와 오늘과 미래의 나를 아울러 만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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