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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 vs 우리 남편 / 유용선

by 전문MC 이재영 2007. 7. 24.

   내 남편 vs 우리 남편  . . . 유용선

 

 

  '내 남편, 내 아내, 내 아들, 내 딸'은 한국말 아니다 

'우리 남편, 우리 아내, 우리 아들, 우리 딸'이 한국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럽어로 번역할 수 없다.

'our husband, our wife' 식으로 번역했다가는 결혼제도가 문란한 야만족속으로 오해받기 딱 좋다. 

'우리'란 말에는 관계를 강조하는 심리가 깃들어 있다.

'우리 남편'이라는 말은 <남편인 그와 아내인 나는 한 식구로서 부모와 자식을 포함한

'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하는 신속하고 함축적인 선포이다. 

 

  친구를 부를 때 '우리 용선이' 하는 식으로 부르면 매우 정겹게 느껴진다.

친구 관계가 환기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자연스럽게 '우리 **'라고 부른다면

그는 당신에게 친근감을 지니고 있거나 적어도 염려해주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가엾게도 유럽사람들에게 이런 용도의 표현이 없다.

주격, 소유격, 목적격, 동격으로 철저히 구분된 인칭구조이다. 

(이렇게 중요한 표현을 번역할 수 없는 마당에 노벨 문학상 따위에 연연하는 것은

사실 촌스러운 짓이다. 이크, 옆길로 샐라.)

 

  요즘 대한민국 마흔 전후의 아저씨와 아줌마들 만났다 하면 탤런트 세 사람 이야기이다. 

김희애와 배종옥과 김상중. 김희애는 나랑 동갑이다.

내가 두 주 정도 생일이 빠르다. 배종옥은 나보다 세 살 누나이고 김상중은 두 살 형이다.

그런데 이들이 극중에서는 모두 삼십대 후반 정도로 설정되어 있다. 

화영(김희애)이 친구인 지수(배종옥)의 남편 홍교수(김상중)와 열애에 빠진다.

누가 누구를 꼬셨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둘 남녀가 원래 다소 바람기가 세다.

화영은 남편과 사별한 경험이 있는 여자인데다가 성장 환경은 가히 완벽한 결손가정이다.

그로 인한 컴플렉스를 스스로도 부인하지 않으며 입버릇처럼 '나쁜 여자'를 자처한다.

그런 화영과 대조적으로 지수는 '착하다 못해 바보스럽기까지 한 여자'의 전형이다.

'착한 아내' 고마운 줄 모르는 철부지 홍교수의 눈에 '나쁜 여자 화영'은 육감적이고 사랑스럽다. 

홍교수는 자식을 핑계로 주말이면 화영을 벗어나고, 바람을 구실로 평일엔 아내를 벗어난다. 

(이혼하고도 매주 자식 핑계로 꼬박꼬박 만나는 가정 치고 나중에 재결합하지 않는 가정 별로 없다.

그러니 이 드라마의 결말은 빤하다.)

 

  화영은 홍교수를 '내 남자'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래서 화영은 지수가 아무짓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끊임없이 '너(지수)'를 의식한다.

잠자리 실력(?)이라면 본래 지수보다 나았지만 막상 동거생활로 들어가니

식사부터 사소한 습관까지 연적인 '너'의 위상이 만만치 않다.

지수는 '우리 남편'인 홍교수에게 화가 나지만 결혼으로 생겨난 다른 관계들,

즉 자식과 시댁 식구 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지수에게 있어 홍교수는 현재 '내 남자'가 아닌 지경이 되었긴 하여도 여전히 '우리 남편'이다.

그러니까 드라마 제목인 '내 남자의 여자'는 화영에게 있어 지수라는 존재를 가리킨다.

화영에겐 바락바락 '내 남편 돌려 줘'하고 대드는 흔해빠진 '내 남자의 여자' 부류가 더욱 만만할 것이다. 그런데 지수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저 결혼으로 생겨난 '우리' 속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홍교수는 화영에게 온 뒤로 오히려 차츰차츰 아내의 울타리가 넓고 아늑했음을 느낀다.

(문득 '울타리'와 '우리'의 어원이 궁금해지는군. 아, 난 왜 이렇게 산만하지.)

 

  화영은 미국에서 살다온 아주 서구적인 사고방식의 여자로 그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우리 남편, 우리 아내, 우리 아들, 우리 딸'을 잘 알지 못한다. 

홍교수를 '내 남자'로 만들려 하는 그녀는 지금도 지수 앞에서 '네 남편, 네 아들'이라는 표현을 쓴다.

반면, 지수는 '우리 남편'의 일부였던 '내 남자'를 친구인 화영에게 빼앗기고도 홍교수가

'우리 아들'의 좋은 '우리 아빠'이자 '우리 아버님'의 좋은 '우리 아들'일 수 있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홍교수는 지수의 '내 남편'은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 남편'이다.

참 무서운 '내 남자의 여자'이다.

세 사람 중에 유일하게 한국말을 하는 한국여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