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시

스미다 / 詩 이병률 (1967~)

by 전문MC 이재영 2007. 3. 10.




스미다


이병률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
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해변 식당에서 아침밥을 시켜 먹으며
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치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 대신 소주 한 병을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
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는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 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내 눈알은 저만한 솜씨도 못 되어서 늘 찔끔하고 마는데
그가 올라앉은 뱃전을 적시던 물기가
내가 올라와 있는 이층 방까지 스며들고 있다
한 몇 달쯤 흠뻑 앉아 있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돌아가는 사내의 집채만한 그림자가
찬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고 있다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파리 영화학교 ESEC 수료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 <그날엔> 당선
시힘 동인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등

------------------------------------------------

[감상]
어디론가 스며들고 싶은 날, 그리고
누군가에게 무작정 스며들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어느 날 무작정 스며든 곳,

울진에서 울컥하고 삶의 비의(悲意)를 느낍니다.

무엇인가에 깊어지다 보면
까닭없이 슬퍼지고, 비통해지고,

사소한 일에도 눈물이 나는 법이지요.
사는 일이란 어찌보면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스며드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뱃전을 적시던 물기는 이층 방까지 스며드는데“
지금쯤 우리는 어디로 스며들고 있는 걸까요.
[양현근]



'추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톡톡 / 詩 류인서  (0) 2007.03.14
사랑 / 詩 김상미 (1957~)  (0) 2007.03.13
나무 물고기 / 詩 차창룡 (1966~)  (0) 2007.03.08
흙 속의 풍경 / 詩 나희덕 (1966~)  (0) 2007.03.06
강 / 詩 조두섭  (0) 2007.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