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 <시향> 2006년 봄호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고려대 영문과를 거쳐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6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철이와 아버지>가 당선 1967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순은이 빛나는 아침에>가 당선 1969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처형의 땅>이 당선 한국문학작가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수상 현재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시집 <아침의 예언>,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겨울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장갑> 저서로 「한국현대시사의 대외적 구조」 「현대시의 이해」등 다수 ------------------------------------------ [감상] 이 시를 읽으면서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나지 않습니까? 허허 소리내어 웃지는 않으셨는지요.... 저도 처음에 이 시를 접하고 나서 왜 그렇게 통쾌하고 재미가 있던지 실실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좆”이라는 말이 본래의 사전적인 의미를 떠나서 썩 좋은 뜻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말이라도 쓰이는 장소나 쓰임새에 따라서 어감이나 의미도 영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이 시에서 “좆”을 그 흔한 욕설이라고 생각할 사람이나 있을까요... 어지간해서는 눈이 오지 않는 땅끝마을에 어느 겨울인가는 참 오지게도 눈이 많이 내렸나 봅니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옹기종기 모여든 주민들이 힘들여 눈을 치우고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걸치고 따뜻한 잠이 들었건만,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간밤에 내린 폭설은 축사 지붕까지 몽당 무너뜨렸나 봅니다. 그러나 동네 이장의 절박한 말투에서 역설적이게도 내일에 대한 소박한 희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정감어린 말투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지금, 중부지방에는 폭설 대신 폭우가 내리고 있군요 [양현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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