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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시

살구나무 아래 / 詩 강인한 (1944~)

by 전문MC 이재영 2007. 3. 17.


살구나무 아래

강인한
  

살구나무 한 주가 탱자울타리 안에 서서
연년생으로 아이 셋을 낳고
그 집을 떠날 때까지
우리 식구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아침마다
꽃잎이 바람에 날리며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지
그리고 어느새 봄이 가는지도 모르게
도랑물에 귀를 적시고
문 밖에서 보리가 익어갈 때
스스스 바람소리를 내며
보리까시락은 아기 업은 아내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싶어하였다
낮은 굴뚝에서 삭정이를 때는 굴풋한 연기
마당에 구름처럼 퍼지는
가을 해거름이 나는 좋았는데
사르락사르락 격자문의 창호지에
깊은 밤 눈발이 부딪는 소리를 손에 쥔 채
젖먹이를 안고 잠든 아내는 왕후의 꿈을 꾸었다.




본명 강동길
1944년 전북 정읍 출생  
전주고등학교, 전북대학교 졸업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1982년 전남문학상  
시집으로 <異常氣候>,  <불꽃>,  <全羅道詩人>,
<우리 나라 날씨>, <칼레의 시 민들>, <황홀한 물살> 등
신춘시 동인(16집~19집), 목요시 동인,
현재 원탁시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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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살구나무가 서 있는 시골집의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살구나무는 연년생으로 낳은 아이 셋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았겠지요.

도화빛 꽃빛이 깊은 날이면 동구 밖 신작로에서는

깜장고무신을 신은 아이들이 땅따먹기 놀이를 하느라

하루 해가 발딱 지는 줄도 몰랐을 겁니다.
그렇게 살구나무 꽃잎을 따라 몇 번의 봄이 피고 지고,
그렇게 청보리는 소리없이 익어 갔을 겁니다.

바람이 불면 청보리는 스스스거리며 저 홀로 봄을 출렁거렸지요.
‘삭정이를 때는 굴풋한 연기’가 고샅에 가득할 때쯤이면
가만가만 내려앉는 어둠이 참으로 아늑했었습니다.
돌담길 골목골목에는 몰려나온 아이들 소리로 가득하고,
사랑방 아궁이에서는 쇠죽이 걸쭉하게 끓고 있었지요.
밤늦도록 두런거리는 情談에 계절은 그렇게 아득하게
깊어만 가고, 어느 골 깊은 겨울 밤,  
“격자문의 창호지에 눈발 부딪는 소리“를 들어보셨는지요
그 소리를 벗삼아 간난아이를 안고 잠이 든 아내의 모습은
또한 얼마나 평안했을까요. 왕후의 꿈이 그만할까요...
[양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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