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김수영(1921~1968)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시평>
김수영은 거대하고 암울한 현실을 향해 자유의지를 쏘아 올린 ‘퓨리턴의 초상’과 같은 시인이다.
그의 가장 큰 매력은 현실의 후진성과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깃든 반근대성에 대립각을 세우고 불화의 길을 걸은 데 있다.
늘 자신을 시대의 첨단에 가져다 놓으려 한 그가 봄밤 애타는 마음에 결코 서둘지 말라고 한다.
개가 짖고, 종이 울리고, 기적 소리가 슬퍼도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고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에 서둘지 말라고 한다.
절제하라고, 절제는 나의 귀여운 아들이고 영감이라고.
반세기도 더 전에 쓰인 시를 읽는 봄밤, 시인의 예지력과 변하지 않는 시대의 서툶을 생각한다.
(곽효환·시인·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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