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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뒤안길

[문단의 뒤안길-1970년대 8] 김주영과 조선작

by 전문MC 이재영 2013. 4. 4.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8>김주영과 조선작

정규웅 | 제107호 | 20090328 입력
 
김주영(왼쪽)과 조선작(오른쪽)
신춘문예 출신이 아니면서 ‘1970년대 작가’에 포함된 김주영과 조선작은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은 소설가였다. 우선 다른 작가들이 20대 중후반에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던 데 반해 이들은 여러 차례 낙방의 고배를 마신 뒤 30대를 훌쩍 넘어서고 나서 71년도에 나란히 등장했다는 점이었다.

데뷔 방법도 특이했다. 김주영은 제도권 밖 문인들이 흔히 ‘문공부 기관지’라 비아냥댔던 ‘월간문학’의 신인상을 받았고, 조선작은 월간종합지 ‘세대’가 실시한 ‘신춘문예 선외작(選外作) 공모’에서 당선해 각각 데뷔했다. 데뷔 후 이들의 작품활동을 눈여겨보면 이들이 오랜 세월 소설 쓰기에 매달렸음에도 데뷔가 늦은 것은 다만 운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김주영이 소설가가 되려고 마음먹은 것은 58년 서라벌예술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한 후 안동의 엽연초생산조합에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소설에 전념하기가 어려워졌다. 일찍 홀로 된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데다가 21세 때 결혼해 계속 불어난 식구들의 생계를 혼자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대학 동기생들인 천승세·유현종·홍기삼·이근배 등은 이미 60년대 초중반에 소설가로, 시인으로, 평론가로 등단해 문명을 떨치고 있었다. 반면 10년 가까운 직장생활에서 김주영이 얻은 것은 1급의 주산 실력과 승진으로 오른 ‘주사(主事)’의 직책뿐이었다. 그래서 김주영은 등단 이후에도 오랫동안 ‘김 주사’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소설을 써 어렵사리 데뷔라는 것을 하기는 했지만, 그의 작품활동은 번번이 벽에 부닥쳤다. 중앙문단에 이렇다 할 ‘연줄’이 없는 탓도 있었지만 대개 ‘월간문학’ 출신을 시원치 않게 보는 풍토였고, 몇몇 잡지 편집자는 그의 작품을 시국적으로 ‘불온’하다고 판단해 게재를 꺼렸기 때문이었다. 데뷔한 후에도 2년 가까이 허송세월하다가 가까스로 지면을 얻어 두어 편 발표하면서 문단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때 발표한 ‘마군우화(馬君寓話)’ ‘모범사육’ ‘도둑견습’ 등 몇 작품을 가리켜 평론가들은 ‘김유정·채만식의 뒤를 잇는 이 시대의 독보적 풍자소설’이라고 격찬했다.

그 후 대중 취향의 신문소설을 몇 편 쓰기도 했으나 그것은 모두 필생의 역작 『객주』를 쓰기까지의 단계적 과정에 불과했다. 『객주』의 구상은 이미 데뷔 전 시작됐고, 자료 수집, 현장 답사 등 취재에만 10년 넘는 세월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70년대 작가’로 불리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것은 조선작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가 ‘세대’의 ‘신춘문예 선외작 공모’에 응모한 것은 순전히 ‘오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작품이 신춘문예에서 번번이 낙방하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그 무렵 신춘문예의 단골 심사위원으로 늘 최종심에서 조선작의 작품을 읽고 낙선시켰던 김동리는 조선작이 한창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을 때 몇몇 문인이 ‘왜 신춘문예에서 조선작을 낙방시켰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재능은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소재나 내용이 영 건전치 못해서….”
그도 그럴 것이 신춘문예 낙선작이며 ‘세대’ 당선작인 ‘지사총(志士塚)’을 비롯해 ‘영자의 전성시대’ ‘성벽’ 등 그의 초기작들은 대개 창녀나 불량배 혹은 알코올 중독자 따위의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밑바닥 삶을 파헤쳐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몇몇 작품이 그를 70년대의 대표적 작가로 끌어올리는 견인 역할을 했으니 소설가로 성공하는 데 작품 소재의 건전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했던 셈이다.

조선작은 작가가 되기 전 특이한 경험을 거쳤다. 고향인 대전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국민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갑자기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서울로 올라와 2년 동안 유현목 감독 밑에서 조감독을 지냈다. 왜 갑자기 영화감독을 포기하고 소설가가 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연 적이 없으나, 소설 공부 5년 만에 인기 작가의 대열에 오른 것을 보면 영화 쪽 재능보다는 소설가 쪽 재능이 더 강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조선작은 누구보다 노력을 많이 하고 공을 많이 들이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사용하는 원고지보다 버리는 원고지가 세 배 이상 많다는 것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