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여자 / 詩 김희업 (1961~)
책 읽는 여자
詩 김희업
책 읽는 소리 들린다
꿀처럼 달게 손끝에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넘기는 소리, 아니 거대한 나무를 넘기는 소리
쓰러지는 나무 몇 페이지 차곡차곡 그녀의 무릎 위에 쌓인다
달음박질치며 앞서가는 활자
놓치지 않으려고 그 뒤를 바싹 쫒는 숨 가쁜 그녀의 눈
그녀의 눈이 톡톡 튀며 책위로 굴러다닌다
방금 전 중앙시장에서 그녀와 눈 맞은 생선
지하철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다
지금 그녀는 책 속에서 바다를 건너는 중이다
축축한 물기가 배어나는 그녀의 손
그녀가 있는 곳으로부터 지상에는 그녀의 남편이
서 있다 돌아가지 못하는 바다,
떨구고 온 비늘 생각에 부릅뜬 눈
철철 흘리고 온 바다를 내내 응시하는 생선의 눈
그녀는 잠시 바다에서 내려
바구니 속 신문에 싼 생선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몇 시간 후면 책장처럼 희디흰 그녀의 손으로
바다는 구워지고 등이 가려운 생선은
자꾸 돌아누우려
석쇠위에서 몸을 뒤척일 것이다 비린 눈물을 피우며
처얼썩 철썩 파도가 우는 것 같아
이제 책장을 덮고 돌아서는 그녀의 중년이 반쯤 접힌다
빛이 빨려 들어가는 좁은 2번 출구를 그녀가
빠져나오고 있을 때 빛과 어둠의 경계는 더욱 뚜렷해진다
거울 속 그녀
한 권의 또 다른 책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책벌레처럼
1998년 『현대문학』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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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화자는 지금 지하철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중이다.
책을 읽으면서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에서 나무를 연상하고,
활자를 따라가는 눈동자에서 어물전에서 갓 사온
싱싱한 생선의 눈물을 생각해 낸다.
그러다가 그 생선이 두고 온 바다,
그 바다의 파도소리며,
아내의 기다림을 건너고 있다.
지하철이 도착하고, 책장을 덮는다.
구겨진 종이컵마냥 중년도 같이 접히고 있다.
지하철 2번출구,
‘빛과 어둠의 경계‘를 빠져나오는 중에도
많은 사람들은 세상으로 가는 또 다른
지하철을 기다리는 중이다.
책장넘기는 소리에서 나무 쓰러지는 소리와
두 눈 부릅뜬 생선, 바다의 기다림이며,
파도소리까지 종횡무진 이끌어 내는 상상력이
기발하다. 자유롭다.
[양현근]